2026년 1월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혁의 결심공판은 한국 사법 역사에 남을 만한 ‘희대의 재판 필리버스터’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국회가 아니라 법정에서, 의사진행이 아니라 재판 진행을 결냥한 사실상의 필리버스터가 공개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국회가 아닌 법정에서 벌어진 필리버스터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내란 결심공판은 오전 9시 20분에 시작해, 서류 증거조사와 쟁점 공방만으로 10시간을 넘길 정도로 지연되었다. 특검의 최종 의견과 구형, 피고인 8명의 최후진술은 당초 계획과 달리 사실상 시작도 못 한 채, 결국 다음 기일로 미췔졌다.
재판부는 “징징대지 말라”는 이례적인 경고까지 내리며 속도를 내려고 했지만, 변호인단과 피고인들이 이의제기와 추가 발언을 반복하며 시간을 소진시키는 동안 법정 안에서는 언론이 표현하듯 사실상 ‘법정판 필리버스터’가 그대로 구현되었다. 국회의 무제한 토론이 법정의 증거조사와 변론 시간에 이식된 셈이다.
대형 로펌과 특수 변호인단의 무제한 자료 공세
이 희대의 재판 필리버스터를 가능하게 만든 배경에는, 대형 로펌과 특수 변호인단이 가진 압도적인 자료 준비 능력이 있다. 이들은 수백만 건의 판례와 논문, 각종 행정자료와 외신 기사까지 동원해 방대한 의견서와 변론 자료를 쏟아내며, “모든 피고인에게 동일한 시간과 기회를 보장하라”는 명분 아래 사실상 시간 써움을 걸었다.
이 전략은 장동혁 대표의 24시간 필리버스터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론된다. 국회에서 시간을 무기로 삼아 입법을 지연시키듯이, 법정에서도 방대한 자료와 장시간 변론으로 재판 진행 자체를 마비시키는 전략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최근 국내 대형 로펌들은 리갈테크와 인공지능을 결합해 판례 검색, 문서 분류, 번역, 의견서 초안 작성 등을 자동화하고 있다. “변호사가 1년 동안 해야 할 일을 1분 만에 처리한다”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로, AI는 대형 로펌의 서면 생산 능력을 질적으로, 양적으로 모두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재판부와 검찰에는 AI가 없다
문제는 이 무한 증폭된 자료 공세에 맞서는 쪽, 즉 재판부와 특검에는 이에 상응하는 AI 도구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대법원과 사법부는 이제야 재판업무 지원 AI 모델 개발, 인공지능위원회 구성 등 ‘검토·시범’ 단계에 머물러 있다.
판사와 검사는 여전히 제출된 서류를 직접 읽고, 인용된 판례와 조문을 일일이 대조하며, 허위·오인 판례를 사람 손으로 가려내야 한다. 결국 판사와 검사는 인간의 눈과 뇌로 이를 검증하느라 재판 기간을 늘리고, 본질적 쟁점 판단에 쓸 에너지를 소모한다.
인공지능 불균형이 만든 새로운 사법 리스크
이렇게 보면 희대의 재판 필리버스터는 개인 몇 명의 ‘말이 많은 변호사’ 문제로 설명되기 어렵다. 한쪽에는 초거대 리갈 AI와 방대한 법률 데이터베이스를 갖춘 대형 로펌·특수 변호인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여전히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에 의존하는 재판부와 특검이 있는 구조적 인공지능 불균형이 핵심 원인이다.
이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내란 재판뿐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대형 형사·정치 사건에서 ‘법정판 필리버스터’는 하나의 표준 전술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AI가 대형 로펌의 무기가 되고, 공공 영역에는 같은 수준의 AI가 부재한 한, 사법 절차는 점점 더 “말 많이 하는 쪽”이 아니라 “AI를 더 잘 쓰는 쪽”에 의해 지배될 것이다.
사법부 내 정보의 비대칭과 경계지대
현재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로펌에 유리하게 사법의 경계지대와 불균형이 존재한다. 재판에서 검사와 판사가 방대한 자료를 변호사가 변론한다면, 이는 필리버스터처럼 실제로 재판 진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전략이 된다.
자체 AI 인프라를 가진 대형 로펌은 판례 분석, 반박 논리 구성, 의견서 자동 생성을 1분 단위로 처리할 수 있지만, 이를 검증해야 하는 공공 영역(검사·판사)은 여전히 수작업에 의존한다. 이 불균형은 재판 속도, 품질, 공정성 모두에 영향을 미치며, 사법부 내에서 정보의 비대칭이 구조화되는 경계지대를 만든다.
이 구조는 단순히 기술적 격차를 넘어, 사법 정의와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부유한 피고인이 대형 로펌과 AI로 무장한 채 시간을 무기화하고, 공공 영역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화된다면, 결국 ‘법 앞에 평등’이라는 원칙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